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찢어버린 답안지

카테고리 없음

by 마머선129 2024. 2. 29. 15:16

본문

한 한기가 끝나고 오늘부터 채점에 들어간다. 늘 그렇듯 내 시험은 오픈 북으로 치러지며 온 세상의 모든 자료를 참고하게 한다. 심지어 옆 친구 답안지를 봐도 좋고 서로 상의해서 글을 쓰는 것도 허용한다.
또 글 쓰는 도구는 연필이든 볼펜이든 상관없다. 글을 고칠 때는 교정부호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수정액이나 테이프를 사용해도 되고, 여의치 않으면 칼이나 종기를 사용해도 좋다. 다만 텀블러 폭탄을 배달하는 일은 엉뚱한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므로 안 된다.
그리고 주어진 주제나 자신이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려도 좋다고 권한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 정말 답안지를 찢어버린 학생이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찢어 버려도 된다고 그랬다고 진짜 찢어버린 것이다.
이 학생은 답안지를 찢어버린 다음에 접착식 메모지에 글을 쓴 다음에 답안지를 이어 붙여서 제출했다.
메모지에 적힌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판단'을 통해 도출된 '정답'만을 마치 기계에서 뽑아내듯 강요하는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스스로 세운 방식에 따라 자기만의 해답을 발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가치이다.
이에 나는 제도가 인간에게 점수를 부여하고 마치 쇠고기 등급 매기듯 인간을 재단하기 위한 수단인 '답안지'를 찢어버림으로써 인간이 바로 그러한 예속으 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학기 동안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은 바로 이 찢어진 답 안지가 잘 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찢어진 답안지를 내가 찾은 가치'에 관한 나의 해답'으로 제출한다."
학생의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영화 <동주>의 송몽규가 윤치호에게서 받은 상패를 내동댕이쳐버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 학생은 알렉산더의 용기를 지녔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칼로 끊어버린!

댓글 영역